2020. 5. 8. 14:01ㆍADHD 일기
나는 강박이 꽤 심한 편이다. 그리고 항상 바쁘다.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것을 철저히 하고 싶어하고 지키지 못했을 때 좌절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대학 생활 중간부터는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계획이나 목표를 아예 던져버렸다. (계획을 세우나 마나 어차피 늘 바빴고, 할게 많았고 마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난 그저 어릴 때부터 평가 받는 것에 대해 예민했고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런줄만 알았다. 나에 대한 내 기준이 높아서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쁜 습관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ADHD치료 약물, 콘서타를 복용하면서 내 강박증은 ADHD의 영향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ADHD의 주의력, 집중력은 적당히, 중간이 없다. 최고점이거나 최저점이거나. 극과 극이다.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주말에 계획보다 늦게 일어나면 하루를 망쳤다는 생각에 짜증이 폭발하고... 결국 늦게 일어나서가 아니라 나의 부정적 감정 때문에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기 일쑤였다. 대한민국의 입시생이라면 하루하루의 공부 계획과 실천이 정말 크게 다가온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하루 스케줄에 갑작스러운 변동사항이 생기거나 놀거리에 유혹이 생기면 내 머리는 그것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 시점부터 나는 다시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계획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나를 철저히 관리했다. 정말 필요한 사람과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바꿨고 친구들이 목요일마다 야자실 컴퓨터에 모여서 다같이 치인트 웹툰을 볼 때도 나는 웹툰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배가 부르거나 살이 찌면 공부에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석식이 제공되지 않을 때는 다이어트 식단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주말에는 누구보다 일찍 자습실에 가려고 했다. 평일에는 등교시간보다 30분 일찍 자습실에 들렀다가 교실에 가곤 했다. 쉬는시간에 나한테 말걸어서 공부 흐름이 깨질까봐 큰 헤드폰을 사서 머리에 쓰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늘 계획이 있었다.
(아마 내 이런 집착 때문에 당시에 칸트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은 칸트 그닥 내스타일 아님.)
어떤 친구들은 나에게 의지가 대단하다고, 부럽다고 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예뻐했다.
그래, 어찌보면 대단할 수도 있겠지만 난 사실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방해요소를 죄다 차단하면서 틈새시간까지 죄다 내 시간으로 만들었는데 난 그 시간을 활용할 능력이 없었던거다.
내가 10시간 자리에 앉아있을 때, 공부에 집중하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였기 때문에 늘 좌절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하면서 성적은 꽤 잘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나는 10시간동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생각했겠지.
나도 웹툰이 정말 보고 싶었다. 적당히 휴식하면서도 휴식시간이 끝나면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모든 외부 요소를 차단하지 않아도 되는, 또는 외부 압력이 없어도 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한 번 수다를 떨면 그 대화내용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는데...
성적에 대한 욕심이 정말 컸고 의지도 의욕도 넘쳐났는데 같은 줄만 반복해서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나는 너무 좌절스러웠다. 답지를 항상 대충 읽어서, 단순 계산에서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나의 점수를 가늠할 수 없는게 너무 싫었다. 실수도 실력이라고 하니까 그저 반성하고 연습했다.
(결국 수능날, 내 주종목이었던 수리 과목에서 단순계산 실수로 20점 넘게 틀렸다. 그날 모르는 문제는 딱 한 개였다.)
나는 성적이 좋고 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전혀 티가 나지 않았고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내 의지력, 노력 부족만 탓했었지....
조용한 ADHD의 전형이 아닐까..
대학에 가면서 내 인생 암흑기가 시작되는데 ㅋㅋㅋㅋ
안맞는 전공, 쏟아지는 팀프로젝트, 장기 프로젝트, 주2회 발표 및 크리틱 등등
대학가면 하고 싶은 것들을 찾고 싶었는데 마감에 허덕거리느라 나는 늘 바빴다. 항상 초조했다. 정말 바쁜 전공이기도 했지만 내가 내 스케줄을 컨트롤하고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매일매일이 허둥지둥이었다. 정말 그 때만큼 스트레스 받았던 시절도 없다. 학점을 적당히 챙기면서 취미생활도 하고 건강도 챙기는 것. 그건 나에게 불가능이었다. 나는 동시에 여러 개를 챙기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수험생 때는 공부를 하니까 공부 시간이라도 정해놓을수가 있었는데 무언가를 창작하는 장기 프로젝트와 타인과 작업하는 팀프로젝트가 일상이다보니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중엔 내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조차 던져버렸다. 될대로 되라지. 마감은 지키겠지. 난 어차피 계획해도 못지키는데, 마음이라도 편하게 가지자.
그렇게 나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최저점의 시기를 겪었다.
(직장을 다니니 퇴근하면 내 시간이라서 그게 너무 좋았음 ㅋㅋㅋㅋㅋ 그외에 힘든 점은 수없이 많았지만... )
그리고 약물 치료를 시작하니 무슨 일이 생겼냐.....
강박증이 없어지고 초조함 없이 현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나게 사소하지만 내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솔직히 ADHD 약물 치료를 시작하기 전보다 나는 게을러졌다. 한동안은 스케쥴러를 아예 작성하지 않았다. 왜냐면 계획을 세우지 않고 지키지 않아도 마음이 초조하지가 않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봐서 한동안은 좀 즐겨보았다. 내가 젤 쓰기 싫어하는 자소서 마감이 18시까지인데 17시까지 제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갑자기 나를 불러서 뭔가를 시키면 할일을 멈추고 10분 정도 도와주고 다시 방에 들어와서 그 시점부터 다시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내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 계획을 지키지 못해도 내일 하면 된다는 생각이 생겼다. (이 생각들은 이전부터 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안됐던 것들이다.)
강박이 없어지니 이유 없이 미루는게 아니라 이유 있는 미루기를 하게 됐다. 내가 미루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을 까먹지 않고 끝낼 수 있다는걸 내가 알기 때문에 할일을 미뤄서 생긴 지금의 시간을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정말정말 미묘한 변화인데 내 삶의 질을 급격하게 높여주었다. 와, 이게 평균적인 사람들의 일상이라니.
이제 게으름을 충분히 즐겼고, 약물 복용 중인 나에게 맞추어 계획을 짜고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강박과 초조함 없이 내 일상을 컨트롤하는 즐거움을 느낄 예정이다.
Take it eas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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